IATA의 역사 — 국제 항공을 관장하는 협회, 그리고 쿠바와의 의외의 인연
쿠바 아바나에 있는 Hotel Nacional de Cuba에 들어섰을 때 일이다. 말레콘 해변가 언덕 위에 서 있는 그 유명한 호텔, 1946년 12월 란스키와 루치아노의 마피아 회의로 더 많이 알려진 바로 그곳이다. Comedor de Aguiar 홀로 이어지는 복도를 걷다가 벽에서 청동 명판과 액자에 든 사진을 발견했다. 명판은 1995년 IATA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직접 설치한 것이었다.
명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5년 4월 19일, 쿠바 아바나의 Hotel Nacional에서 국제항공운송협회 IATA가 창립되었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공식 사이트 iata.org/about/history에는 “founded in Havana, Cuba”라고만 되어 있고, 호텔 이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창립 기념 보도자료에도 마찬가지다. Comedor de Aguiar의 청동 명판은 IATA가 스스로 탄생 장소를 명시한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다. 공식 홍보 채널에서 이 사실을 왜 쏙 빼놓는지 파고들다 보면, 공식 버전보다 훨씬 흥미로운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IATA는 왜 만들어졌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국제 항공이 빠르게 성장할 것이 분명해졌고 공통 규칙이 필요했다. 1944년 11월부터 12월까지 시카고에서 52개국이 참여한 대규모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체결된 시카고 협약은 ICAO를 탄생시켰다. ICAO는 정부 차원의 규제기관으로, 기술 표준·비행 안전·영공 주권 원칙을 담당했다.
그런데 시카고 협약에는 큰 구멍이 하나 있었다. 바로 경제 문제였다. 국가 간 운임은 누가, 어떻게 정하나? 시장은 어떻게 나누나? 런던-뉴욕 노선에서 각 항공사가 가져가는 몫은 얼마나 되나? 미국은 완전한 자유화를 밀어붙였다. “어디든 날고, 얼마든 받겠다”는 식이었다. 영국과 호주는 엄격한 쿼터제와 고정 운임을 요구했다.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시카고 협약은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갔다.
IATA는 바로 이 구멍을 메우려고 만들어졌다. 다만 정부 차원이 아니라 항공사들 스스로의 차원에서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주요 국제 항공사를 한 단체에 묶어, 가격 경쟁 없이 운임·스케줄·운송 조건을 서로 합의하게 만드는 것. 2020년대 법률 용어로는 카르텔이다. 1945년 당시 표현으로는 “시장 질서화”였다.
카르텔이란 경쟁사들이 가격과 조건에서 서로 경쟁하지 않기로 맺는 협정이다. 대부분의 산업에서는 독점금지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전후 항공업계에서 IATA의 운임 협의체는 독점금지 면제를 받았다. 미국에서는 1945년 민간항공위원회(Civil Aeronautics Board)가 승인했고, 1955년부터는 기간 제한 없이 허용됐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도 뒤따랐다. 이 면제는 미국 법무부가 최종적으로 취소한 2006년까지 유지됐다.
사건의 현장 – Hotel Nacional과 Comedor de Aguiar 홀
Hotel Nacional de Cuba는 1930년 12월 30일 문을 열었다. 설계는 뉴욕의 McKim, Mead & White 사무소가 맡았다. 펜실베이니아 역과 보스턴 공립도서관을 지은 바로 그 회사다. 자금은 National City Bank of New York(현 Citibank)이 댔고, 운영은 뉴욕 Plaza Hotel 팀이 맡았다. 이름은 쿠바 호텔이지만, 자본과 경영진의 출처로 보면 쿠바 땅 위의 미국 자산이었다.
1945년 4월 회의 당시 호텔은 시카고 개발업자 아놀드 커비(Arnold Kirkeby)의 Kirkeby Hotels Corporation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가스 루소(Gus Russo)의 저서 『Supermob』(Bloomsbury, 2006)은 커비의 회사가 조직범죄와 얽혀 있었음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의 간판 호텔인 시카고의 Drake Hotel은 여러 자료에서 “마이어 란스키(Meyer Lansky)가 통제하는 컨소시엄의 일부”로 묘사된다. 커비 본인은 공개 증언을 한 적도, 기소된 적도 없다. 하지만 시카고 신디케이트 인물들과 엮인 기록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렇다고 IATA를 마피아가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1945년 4월 기준으로 IATA가 창립된 호텔이 쿠바 내 미국 비즈니스 인프라의 일부였고, 그 인프라에는 나름의 특성이 있었다는 뜻이다.
Hotel Nacional 안쪽 중정은 스페인풍 아치형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1945년 4월, 31개국 41개 항공사 대표단이 바로 이 복도를 오갔다. IATA 헌장이 서명된 Comedor de Aguiar 홀은 호텔의 중심 만찬장이다. 1762년 영국의 아바나 포위전 당시 공을 세운 쿠바 시의원 돈 루이스 호세 데 아기아르(don Luis José de Aguiar)의 이름을 따왔다. 회의 장소로 이 홀이 선택된 건 아마 실용적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규모와 격식 면에서 걸맞은 공간이 달리 없었으니까.
누가 기획했고, 누가 홀에 앉아 있었나
액자 사진에는 다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각자 고유한 이력과 이 회의에서의 역할이 있다. 한 명씩 살펴보자.
존 코브 쿠퍼 주니어(John Cobb Cooper Jr., 1887-1967)
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쿠퍼는 1934년부터 1945년까지 Pan American Airways 부사장이자 이사회 멤버였다. 동시에 1944년 ICAO를 설립한 시카고 회의의 미국 대표단 고문이었고, 1945년 IATA 첫 집행위원회 위원이었다. 1946년부터 1967년 사망할 때까지 IATA 법률 자문을 맡았다. 헌장과 운임 협의체, 가격 합의 메커니즘 등 IATA의 법적 구조를 직접 설계한 사람이다.
Pan American Airways는 1945년 기준 미국 최대 항공사였고, 대서양 횡단 노선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Cubana de Aviación, Mexicana de Aviación 등 10여 개 중남미 항공사의 대형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1980년대 수차례의 재정위기 끝에 1991년 운항을 중단했다.
쿠퍼는 1947년 『The Right to Fly』를 출간했다. University of Chicago Law Review의 서평은 직설적이었다.
— University of Chicago Law Review, 1948년 서평
현대적 언어로 옮기면, 업계 규칙을 설계한 사람이 동시에 그 업계 최대 기업의 임원이었다는 이야기다. 규제 분야에서는 이걸 규제 포획(regulatory capture), 즉 규제 대상 산업이 규제기관을 장악하는 현상이라고 부른다.
차파 대령(Coronel Pedro A. Chapa Quiroga, 1890-1972)
멕시코 혁명 시기의 군인 출신 조종사였다. 1944년부터 1945년 사이 연달아 열린 핵심 항공 회의 세 곳 – 시카고(ICAO 설립), 아바나(IATA 설립), 몬트리올(IATA 첫 연례총회) – 에서 멕시코 대표단을 이끌었다.
아바나에서는 당시 중남미 최대 항공사였던 Compañía Mexicana de Aviación을 대표했다. 1944년 이전까지 Mexicana는 Pan American이 100% 소유하고 있었다. 1944년 아론 사엔스(Aarón Sáenz)가 이끄는 멕시코 컨소시엄이 일부 지분을 인수하면서 Pan Am 지분이 55%로 줄었다. 표면적으로 멕시코 회사가 됐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Pan Am 궤도 안에 있었다. 아바나에서 Mexicana를 대표한 건 차파였다. Mexicana는 2010년 운항을 중단했다.
쿠바 자료에 그의 기록이 거의 없는 건 단순한 이유에서다. 그는 쿠바 사람이 아니었다. 1972년 쿠에르나바카에서 사망했다.
구스타보 쿠에르보 루비오 박사(Dr. Gustavo Cuervo Rubio, 1890-1978)
피나르 델 리오 출신 쿠바 산부인과 의사이자 정치인이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바티스타 정권에서 쿠바 부통령을 지냈다. 1944년 10월부터는 바티스타의 정치적 맞수였던 그라우 정부에서 외무장관을 맡았다. 사진 속에서 정부를 대표해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쿠에르보 루비오는 이 회의에서 실질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IATA 헌장 초안은 아바나 회의 6개월 전부터 워싱턴과 시카고에서 Pan American 소속 법률팀과 마차도가 이끄는 쿠바 팀이 작성했다. 1945년 4월 아바나에 도착한 대표단은 서명만 하면 됐다. 외무장관이 자리했던 건 외교 관례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외국 대표단을 접견할 때는 외무부가 옆에 서 있어야 한다.
라몬 그라우 산 마르틴 대통령(Ramón Grau San Martín, 1881-1969)
1944년 10월부터 1948년 10월까지 쿠바를 통치했다. 개혁 성향의 포퓰리스트로, 젊은 시절 아바나 대학교에서 생리학을 가르쳤다. 사진 속에서 대표단에게 연설하는 모습은 회의 개최국 정상으로서의 역할이다.
그라우 정부는 오늘날 중남미 역사 교과서에서 국가 차원의 부패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그라우 시절 교육부 장관 호세 마누엘 알레만(José Manuel Alemán)은 BAGA(Bloque Alemán de la Generación del Aire)라는 구조를 통해 학교 건립과 교사 급여 목적의 세수를 빼돌렸다. 이 돈은 마이애미 부동산 매입, 항공기 구입, 1949년 알레만이 직접 사들인 야구팀 ‘마이애미 선 삭스’ 구단에 쏠렸다. 1950년 그가 사망했을 때 마이애미에 남긴 개인 재산은 당시 기준으로 6천만~1억 달러, 현재 가치로는 약 10억 달러에 달했다. 말 그대로 쿠바 국고에서 뜯어간 돈이었다.
그라우가 IATA나 Pan American으로부터 직접 무언가를 받았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전반적인 맥락이 스스로 말한다. IATA 헌장이 서명된 나라의 장관들이 불과 수년 뒤 노골적으로 수레에 돈을 싣고 마이애미로 갔다.
루이스 마차도 이 오르테가(Luis Machado y Ortega, 1899-1979)
쿠바 변호사로, 1923년 쿠바 최초의 국제 항공법 논문 『Legislación Internacional del Aire』를 출간했다. 마차도는 Expreso Aéreo Interamericano의 이사였는데, 이 쿠바 화물 항공사는 IATA 창립 회원사 중 하나였다. 즉 국제협회 헌장을 작성한 사람이 동시에 해당 협회 회원사 중 한 곳의 책임자였다. Expreso Aéreo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마차도는 1944년 12월 워싱턴 Carlton 호텔에서 열린 초안 작성 회의에서 동료들에게 아바나에서 창립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이후 헌장 위원회를 이끌며 최종 문안 전체를 자신의 주도로 완성했다.
그의 이후 경력은 항공 비즈니스와 국제 금융 관료주의가 어떤 정권 위에도 살아남는지를 잘 보여준다. 1946년 세계은행(World Bank) 쿠바 측 이사로 임명됐다. 1950년 프리오(Prío) 대통령이 그를 주미 쿠바 대사로 파견했다. 1952년 4월 바티스타가 프리오를 쿠데타로 몰아냈고, 마차도는 대사직을 내려놨다. 하지만 워싱턴을 떠나지는 않았다. 세계은행이 곧바로 그를 “중남미 특별 문제 담당” 직책으로 공식 채용했다. 이제는 쿠바 대표가 아니라 은행 자체의 지역 전문가로 일하게 된 것이다. 1954년 바티스타 정부 대표로 다시 이사직에 올랐다. 바티스타 정권은 이미 미국의 공식 승인을 받은 상태였다.
1959년 1월 1일 쿠바 혁명이 일어났다.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했고, 바티스타는 도주했다. 카스트로의 새 정부는 워싱턴의 관료 마차도를 소환하지 않았다. 혁명 초기에는 쿠바 국내 문제에 정신이 없어 해외 대사관까지 손이 미치지 않았다. 1960년 카스트로는 미국계 석유 회사, 은행, 설탕 공장을 국유화했고, 미국은 금수 조치로 응했다. 1960년 11월 쿠바는 사실상 세계은행에서 탈퇴했다. 분담금 납부를 중단하고 의결권도 잃었다. 그 이후 마차도는 공식적으로 쿠바를 대표하지 않았지만, 은행에는 계속 남았다. 이후 10년 동안 그의 직함이 정확히 어떻게 정리됐는지는 공개 자료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부 자료는 관성적으로 “쿠바 대표”로 부르고, 다른 자료는 직원으로 표기한다. 아마 세계은행 이사회를 구성하는 중남미 지역 그룹 중 하나에서 기술 전문가로 일했을 가능성이 높다.
1961년 쿠바와 미국은 외교 관계를 끊었다. 1962년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졌다. 그 모든 시기 동안 마차도는 워싱턴 은행 사무실로 출근했다. 71세였던 1970년에야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16년 연속 재직이었다. 퇴임 후에도 International Finance Corporation(세계은행 산하 투자 부문)과 주미 온두라스 대사관의 자문으로 활동했다. 1979년 워싱턴 외곽 베데스다에서 사망했다. 쿠바로는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24시간 만에 두 개의 국제기구 – IATA와 ICAO
당시 쿠바가 항공 관련 문서에 서명하는 속도는 그 자체로 많은 걸 말해준다. IATA 헌장 서명 다음 날인 1945년 4월 20일, 쿠에르보 루비오는 같은 손으로 국제민간항공에 관한 시카고 협약, 즉 ICAO의 근거 문서에도 비준했다. 다시 말해 24시간 안에 쿠바 외무장관이 두 개의 국제 항공 체제에 서명한 것이다. 먼저 IATA – 항공사들이 스스로 운임을 정하고 노선을 배분하는 카르텔. 그 다음 시카고 협약 – 국가들이 그 항공사들을 규제하겠다고 약속한 문서. 즉 같은 날, 국가는 항공사에 가격 자율권을 넘기는 문서에 서명하고, 동시에 그 항공사들을 규제하겠다는 문서에도 서명했다.
두 기관 모두 1945년부터 같은 도시에 있다. ICAO는 999 University Street, 몬트리올. IATA는 800 Place Victoria, 몬트리올. 걸어서 10분 거리다. 다른 산업이라면 이해충돌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항공업계에서는 “업계 협력”이라고 부른다. 쿠바는 24시간 안에 같은 산업을 규율하는 두 기관의 문서에 모두 도장을 찍었다. 하나는 국가 기관(ICAO), 하나는 기업 기관(IATA). 국가가 운임 규제를 공식적으로 그 운임을 납부하는 항공사들에게 넘겨준 것이다.
31개국 41개 항공사
수치는 자료마다 엇갈린다. IATA 공식 기록에는 “57개 창립 회원”, ICAO 연표에는 31개국 41개 항공사가 아바나 홀에 실제로 참석했고 나머지는 1945년 중에 합류했다고 적혀 있다.
| 지역 | 창립 항공사 | 지정학적 의미 |
|---|---|---|
| 미국 + Pan Am 계열 | Pan American, TWA, American, United, Eastern, Northwest, Braniff + Pan Am 중남미 자회사 (Panair do Brasil, LACSA, Panagra) | 조율된 지배력, 약 12표 |
| 영국 연방 | BOAC (현 British Airways), Trans-Canada Air Lines (Air Canada), Qantas, South African Airways, Tasman Empire Airways | 미국에 대한 제도적 견제 |
| 해방된 서유럽 | KLM, Sabena, Air France, 체코 CSA | 유럽 플래그십 네트워크의 씨앗 |
| 권위주의 중립국 | Iberia (프랑코 스페인), Aero Portuguesa (살라자르 포르투갈), Swissair, Aer Lingus | 정치와 비즈니스 분리 – 아무 문제 없이 합류 |
| 중남미 | Cubana de Aviación, Mexicana, Avianca, Varig, Cruzeiro do Sul, LAN-Chile (현 LATAM) | 개최국 + 친미 블록 |
| 소련과 동유럽 | 불참 | 자발적 불참, 항공 분야 냉전의 시작 |
| 추축국 | 불참 | 독일, 일본, 이탈리아 – 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자격 박탈 |
정치적으로 가장 무거운 빈자리는 아에로플로트(Aeroflot)였다. 소련은 1944년 11월 시카고 회의 불참 이유로 스페인, 포르투갈, 스위스가 참여한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내세웠다. “소련에 적대적 정책을 편 국가들”이라는 이유였다. 아에로플로트는 고르바초프 시대인 1989년에야 IATA 정회원이 됐다. 아바나로부터 44년이 지난 뒤였다. 냉전의 달력이 공식 선포 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다.
Lufthansa는 창립 회원이 아니었다. 종종 잘못 언급되기도 하지만, 1945년에 독일 항공사는 해산됐고 1953년에야 재창설됐다. Japan Airlines 역시 1945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IATA 창립 당시 회원사 전체 목록은 IATA 공식 사이트에 아카이브 이미지 형태로만 공개되어 있다.
버뮤다 협정 – 카르텔의 합법화
카르텔은 국가가 인정해줄 때만 작동한다. 그리고 그 인정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아바나 회의로부터 10개월 뒤인 1946년 1월 15일부터 2월 11일까지, 미국과 영국은 버뮤다에서 전후 항공 운송에 관한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물인 버뮤다 협정(Bermuda I)은 이후 수십 년간 국제 항공 시스템의 표준이 됐다.
협정 부속서(Annex II §(b))에는 이런 문장이 직접 들어가 있다. “Civil Aeronautics Board of the United States having announced its intention to approve the rate conference machinery of the International Air Transport Association…” 외교 언어를 풀어쓰면, 미국 항공 규제기관이 IATA 내부의 운임 합의 메커니즘을 승인하겠다고 미리 선언했다는 것이다. 국가들이 항공사끼리 가격을 담합해도 된다고 공식 허용한 것이다.
며칠 뒤인 1946년 2월 12일, 영국 항공부 장관 윈스터 경(Lord Winster)이 상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IATA는 “as a rate-fixing body acting through their various route conferences” – 노선별 협의체를 통해 운임을 설정하는 기관으로 인정된다고. 이 시점부터 가격 담합은 항공사들 사이의 내부 합의가 아니라 국제 항공 체제의 합법적 일부가 됐다.
순서는 명확하다. 먼저 업계가 아바나에서 운임 설정 권한을 가진 구조를 만들었다. 10개월 뒤 미국과 영국 정부가 국가 간 조약으로 그 구조를 인정했다. 미국 민간항공위원회(CAB)는 IATA 운임 협의체에 독점금지 면제를 부여했다. 처음엔 1년 한시, 1955년부터는 기간 제한 없이. 이후 수년 안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도 협정에 가입했다.
IATA 운임 협의체의 독점금지 면제는 미국 법무부가 2006년에야 취소했다. 버뮤다 협정으로부터 60년 만이었다. 그 전까지 IATA 회원 항공사들은 국제 노선에서 동일한 운임을 협의·설정할 법적 권리가 있었다. 유럽도 비슷한 과정을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밟았다. 면제 취소 이후 IATA는 계속 존재하지만 역할이 바뀌었다. 지금은 운임 카르텔이 아닌 기술·표준화 기관이다. 하지만 당신의 항공권 코드에 찍힌 두 글자짜리 IATA 코드는 1945년 아바나의 직접적인 유산이다.
IATA를 만든 항공사들이 그 뒤 어떻게 됐나
IATA 코드(항공사 두 글자 식별코드)는 IATA가 직접 부여한다. 항공사가 문을 닫으면 그 코드는 몇 년 뒤 반납되고 전혀 다른 나라의 전혀 다른 항공사에 재발급될 수 있다. 그래서 1939년 Pan Am의 보잉 314 클리퍼가 대서양을 횡단할 때 쓰던 코드가 지금은 카라치-두바이 이코노미 항공권에 찍히기도 한다.
1945년 4월 19일 Hotel Nacional 테이블에 앉았던 네 개의 항공사 중 오늘날까지 원래 모습 그대로 살아 있는 건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이렇게 됐다.
| 코드 | 1945년 당시 | 현재 | 무슨 일이 있었나 |
|---|---|---|---|
| PA | Pan American Airways (미국) | airblue (파키스탄, 저가항공) | Pan Am은 1991년 파산했다. 코드가 반납된 뒤 파키스탄 항공사에 재발급됐다. |
| MX | Compañía Mexicana de Aviación (멕시코) | Breeze Airways (미국, 저가항공) | Mexicana는 2010년 운항을 중단했다. 2021년부터 JetBlue 창업자 데이비드 닐먼(David Neeleman)의 미국 항공사가 이 코드를 쓰고 있다. |
| CU | Cubana de Aviación (쿠바) | Cubana de Aviación (쿠바) | 1929년 창립 이후 지금까지 같은 회사가 운항하고 있다. 이 다섯 곳 중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한 유일한 창립 회원이다. |
| — | Expreso Aéreo Interamericano (쿠바) | 존재하지 않음 | 마차도가 회의 자체를 주선한 쿠바 화물 항공사. 쿠바 혁명 전에 이미 폐업했고, IATA 코드도 소멸됐다. |
IATA의 논리는 간단하다. 코드는 과금과 예약을 위한 기술 식별자이지, 역사 기념물이 아니다. 회원사가 3년 연속 회비를 내지 않으면 IATA는 코드를 회수하고,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다음 신청자에게 넘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항공사에 대한 예외는 없다.
Hotel Nacional에 모인 다섯 명을 전체적으로 보면, 테이블에 있던 항공사 네 곳 중 세 곳이 어떤 식으로든 Pan American Airways와 연결되어 있었다. 쿠에르보 루비오와 그라우는 개최국을 대표해 서명했다. 오늘날 IATA가 스스로를 칭하는 “국제 기술 협회”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차라리 Pan American Airways가 세 개의 계열사와 쿠바 정부를 공증인으로 앉혀놓고 자기 자신과 계약한 것에 가깝다. 그리고 마지막 아이러니는 이렇다. 이 다섯 곳 중에서 IATA 창립 회원의 직접적인 제도적 계승자로 남은 건 Cubana de Aviación 하나뿐이다. 업계에 IATA라는 개념 자체를 심은 Pan American은 창립 50주년조차 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IATA는 왜 Hotel Nacional 얘기를 하지 않나
처음에 던진 질문으로 돌아간다. IATA는 자신이 Hotel Nacional에서 창립됐다는 걸 알고 있다. 1995년에 직접 청동 명판을 달았으니까. 그런데 왜 오늘날 iata.org/en/about/history/에는 그냥 “founded in Havana, Cuba”라고만 쓰여 있고, 역대 사무총장 연설이나 기념일 보도자료에서도 호텔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을까.
내가 파악한 바로는 이유가 여러 겹으로 얽혀 있다. Hotel Nacional은 2020년 9월 28일부터 미국 국무부의 쿠바 금지 숙박시설 목록(Cuba Prohibited Accommodations List)에 올라 있다. “미국 사법권 하의 인물”은 이곳에 숙박하거나 요금을 지불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된다. IATA 본부는 몬트리올이지만, 가장 큰 회원사들인 American, Delta, United는 미국 항공사다. 2015년에 당시 사무총장 토니 타일러(Tony Tyler)가 기념 명판 앞에서 기념 만찬을 열었는데,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미국 측 참석자들에게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거기에다 호텔은 1960년 6월 카스트로가 국유화했다. Pan Am의 자회사인 InterContinental Hotels로부터 빼앗은 것이었다. 그리고 1946년 12월에는 『대부 2』에 등장하는 아바나 마피아 컨퍼런스의 배경이 된 장소다. 미국 기업들을 주로 대변하는 무역 협회 입장에서는 제재, 쿠바 혁명, 마피아라는 연상 이미지가 한꺼번에 붙는 건 평판 관리 차원에서 불편하다.
쿠바 쪽도 반대 이유로 비슷하게 침묵하고 있다. 쿠바 백과사전 ECURED는 창립 날짜를 “1945년 10월”로 잘못 기재하고 있다. 창립 50주년, 75주년, 80주년 중 어느 하나에도 국영 신문 『그란마(Granma)』에 기념 기사가 실린 적이 없다. 세계은행 간부로 변신한 관료와 바티스타 시절 부통령이 귀빈으로 참석한 부르주아 기술관료적 산물을 혁명 역사서술이 자랑스럽게 다룰 리 없다.
양쪽의 침묵은 모두 하나의 입장이다. Comedor de Aguiar 홀의 청동 명판이 이 사건의 정확한 장소를 기록한 몇 안 되는 흔적 중 하나로 남아 있는 이유다.
이 역사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
사실들을 모아놓으면, IATA나 쿠바 어느 쪽의 공식 서사에도 맞아들어가지 않는 그림이 나온다. IATA는 중립적인 기술 협회로 태어난 게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몇 주, 서방 자본주의가 치밀하게 설계한 산업 카르텔이었다.
법적 구조는 쿠퍼가 짰다. 동시에 Pan Am 부사장이자 IATA 종신 법률 자문이었던 사람이. 초대 회장은 캐나다인이었다. 미국과 영국 사이의 절충안이었다. 초대 사무총장은 영국 공무원이었고, 그 전에는 버뮤다 협상을 직접 주도한 영국 민간항공 수장이었다. 개최국은 바티스타 시절 부통령을 외무장관으로 앉힌 채, 국고를 털어가는 대통령 정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개최 항공사는 Pan Am 계열사였다. 개최 호텔은 란스키와의 연관이 문서로 확인되는 시카고 개발업자 소유였다. 소련과 추축국은 없었다.
10개월 뒤 버뮤다 협정이 카르텔 운임 협의체를 합법화했다. 독점금지 면제는 2006년에야 취소됐다. 60년 만이었다.
이건 음모론이 아니다. 전후 항공 역사에 관한 문서화된 사실이고, 1차 자료와 학술 연구(루이스 슈워츠, 1954; 존 해니건, 1982), 탐사 저술(가스 루소 『Supermob』, 2006)로 추적 가능하다. 개별 요소들은 각각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데 모으면, 미국 기업 항공사, 쿠바 친미 엘리트, 시카고 호텔 신디케이트, 프린스턴 법학 출신 법률가가 함께 짜낸 구조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구조가 이후 60년간 전 세계 항공 운송을 지배했다.
지금의 Hotel Nacional
호텔은 현재도 영업 중이고, 명판과 사진을 보러 가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Comedor de Aguiar 홀은 호텔 투숙객이 아니어도 입장 가능하다. 주소는 Calle 21 esquina O, Vedado, 아바나. 홀은 본관 건물의 말레콘 쪽에 있다. 로비 컨시어지에게 Comedor de Aguiar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된다. 직원들이 안내를 잘 해주더라고요.
호텔 안에는 ‘명예의 전당(Hall of Fame)’도 있다. 윈스턴 처칠, 어니스트 헤밍웨이부터 에롤 플린, 에바 가드너까지 역대 유명 투숙객 사진들이 걸려 있다. 1946년 12월 마피아 컨퍼런스 이야기도 전시되어 있다. IATA 역사와 달리, 마피아 이야기는 호텔 입장에서 상업적으로 팔리는 전설이니까.
Hotel Nacional은 2020년 9월 28일부터 미국 국무부 쿠바 금지 숙박시설 목록에 올라 있다. 미국 시민은 이 호텔에 숙박하거나 비용을 지불할 수 없다. 하지만 관광객으로 그냥 들어가서 Comedor de Aguiar 홀을 보고 명판을 확인하는 것 – 그 자체는 이 제한에 해당하지 않는다.
자주 묻는 질문
1945년 4월 19일, 쿠바 아바나 Hotel Nacional de Cuba의 Comedor de Aguiar 홀에서 창립됐다. 창립 회의는 4월 16일부터 19일까지 진행됐다. 법인 설립은 1945년 12월 캐나다 의회 특별법으로 완료됐고, 그 이후 몬트리올에 본부를 두고 있다.
H.J. 시밍턴(Herbert James Symington), 캐나다 Trans-Canada Air Lines(현 Air Canada) 대표였다. 전후 항공 질서를 실질적으로 좌우한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절충안으로 선택된 캐나다인이었다.
자료마다 다르다. IATA 공식 기록에는 “31개국 57개 창립 회원”이라고 되어 있다. ICAO에 따르면 31개국 41개 항공사가 아바나에 실제로 참석했고, 나머지 16개사는 1945년 중에 합류했다. Lufthansa는 포함되지 않는다. 1945년에 해산됐고, 1953년에야 재창설됐다. 아에로플로트도 불참했으며 1989년에야 가입했다.
가능하다. Hotel Nacional de Cuba의 Comedor de Aguiar 홀은 방문객에게 열려 있다. 호텔 투숙객이 아니어도 입장할 수 있다. 로비 컨시어지에게 물어보면 안내해준다. 홀 벽에는 1995년 IATA 청동 명판과 1945년 4월 19일의 액자 사진이 걸려 있다.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1945년 4월 당시 러키 루치아노(Lucky Luciano)는 뉴욕 주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마이어 란스키는 잠시 쿠바를 떠나 있었다. 유명한 마피아 아바나 컨퍼런스는 20개월 뒤인 1946년 12월에 같은 호텔에서 열렸다. 다만 1945년 4월 당시 호텔을 운영하던 Kirkeby Hotels 회사는 미국 조직범죄와의 연관이 문서로 확인된다. 이건 IATA 창립에 직접 개입했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 시대적 배경이다.
그렇다. 그리고 이건 공식적인 사실이다. IATA 운임 협의체는 미국에서 독점금지 면제를 받았다. 1945년 민간항공위원회(CAB)가 승인했고, 1955년부터는 기간 제한 없이 허용됐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도 비슷한 면제를 부여했다. 회원 항공사들은 국제 노선에서 동일한 운임을 합의·설정할 법적 권리가 있었다. 이 면제는 2006년 미국 법무부가 취소했다. 사회학자 존 해니건은 1982년 논문에서 IATA를 “세계 항공 카르텔”이라고 직접 칭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다음 1차 자료 및 학술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 IATA 공식 역사 페이지: iata.org/en/about/history
- ICAO 우편 역사 – IATA 창립 상세 연표: icao.int/sites/default/files/postalhistory/iata_international_air_transport_association.htm
- 루이스 마차도 부고, Washington Post (1979년 2월 10일)
- Wikipedia: John Cobb Cooper – 프린스턴 대학교 아카이브 (UPENN_BIDDLE_PU-L.MSS.018)
- 미국 국무부 국제정보프로그램국 – 1946년 버뮤다 협정 원문
- Hansard, 영국 상원 회의록 1946년 2월 12일 – 윈스터 경 발언
- 가스 루소, 『Supermob』 (Bloomsbury, 2006) – Kirkeby Hotels와 조직범죄 연관 기록
- S. 에를리히, “Ramón Grau San Martín: Cuba’s Prophet of Disappointment, 1944-1951”, ASCE Cuba Database
- 루이스 B. 슈워츠, IATA 운임 협의체 독점금지 면제에 관한 학술 논문, 1954년
- 존 해니건, “International Air Transport Association as a World Aviation Cartel”, 1982년
- 쿠바 금지 숙박시설 목록 – 31 CFR 515.210, 미국 재무부 OFAC
- Aviation Week, 토니 타일러의 Hotel Nacional 방문 사진 기사, 2015년 11월 25일
- 저자의 Hotel Nacional de Cuba 현장 방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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